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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하버드 사랑학 수업 : 아직도 첫눈에 빠지는 걸 두려워하는 나에게책/에세이 2020. 4. 13. 22:41
안녕하세요! 훤칠한 흔남입니다 :-)
'하버드 사랑학 수업' 6번째 시간.
첫눈에 반한 사랑은 믿을 수 없나? 그런 사랑에는 언제나 오해와 배신이 뒤따를까?
하버드 사랑학 수업 저자는 되레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언급한다.
누군가에게 이끌릴 때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상대가 이룬 성취가 아니라 '그것' 때문이라고 한다. 그냥 이런저런 것이 아니라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인간의 가장 깊은 욕망의 대상이자, 특정한 '그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인생에서 가장 기본적인 교훈을 얻게 된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는 걸. 우리는 전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세상에 견줘보면 우리는 상당히 하찮은 존재라는 걸 배우게 된다. 우리가 '결핍'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사춘기가 될 때쯤.. 또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우리는 '그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인생은 불공평하며 내가 결코 불굴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도... 뭔가 완전치 않은 듯한 이 느낌은 우리를 평생 따라다니고, 알 수 없는 불만감이 일상의 저변을 흐르게 된다. '그것'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은 만성적으로 슬픔에 젖어 살거나 자살 충동까지도 느낀다. 이런 감정에 깊숙히 파고든 사람들은 실존적 허무를 이해하는 일에 일생을 바치기도 한다. 이 공허함을 '무', '결핍', 또는 '가슴 깊은 곳에서 북받치는 조용한 흐느낌'이라고 부른다.
이런 내면의 공백에 대처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 형태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공백이 생기는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하기에 손볼 수도 없다. 설령 손볼 수 있다 해도 그 공백을 없앨 방도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를 상쇄할 방법을 찾는 것 뿐이다. 우리 존재 안에는 커다란 구멍이 있고 우리는 그 구멍을 채우려는 희망으로 뭔가를 하나씩 채워넣고 있다. 그게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인류의 업적이란 알고 보면 이런 인간의 근본적 불안을 덜고자 하는 열망에서 시작된 것이다. 잃어버린 '그것' (다시 온전해진 기분)을 대체할 뭔가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사물은 우리가 잃어버린 '그것'의 희미한 반영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의 희미한 자취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내 몫의 디저트를 다 먹은 뒤에도 남의 아이스크림이 탐나듯이 오래된 욕망이 채워지면 새로운 욕망이 생기는 법이다.
즉,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바라게 된다. 영적인 깨달음을 원하는 이들이 소유물을 다 버리고 수도원에 칩거하게 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욕망을 죽이는 최선의 방법은 욕망을 충족시켜주지 않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책의 저자는 단언컨대 사랑하는 사람만큼 우리 존재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것은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사랑하는 사람이야말로 우리의 불완전함을 잊게 해주는 최고의 방어막이자 자아성취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물론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은 사랑에 미칠 때에야 비로소 온전함을 느끼는 존재다. 사랑에 빠지면 우리 안의 결핍은 즐거움과 생기와 가능성으로 다시 충만해진다. 인생은 그제야 의미를 되찾는다.
우리는 더 이상 풍랑 이는 바다의 작은 조각배가 아니다. 외려 작은 연못의 큰 배가 된다. 사랑에 빠지면 꿈에 그리던 '그것'을 얻은 것만 같다... 라캉은 이런 사실에 대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탐내는 '그것(객체, 대상)의 권위'를 부여했다고 표현한다.
남자 역시도 여자를 급조한 제단에 올려놓고 숭배하기에 바쁘다. 남자나 여자나 다 인생이라는 퍼즐을 완성시켜줄 마지막 조각 같은 그 사람을 숭배하고 싶어한다. 우리를 다시 낙원으로 데려가주겠다는 사람인데 당연하지 않겠나?
받아들이기는 어렵겠지만 그를 포함하여 그 어느 누구도 우리 존재를 온전하게 만들어줄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첫째 '그것'이라는 판타지가 실은 하잘것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능했던 적도 없거니와 애초에 낙원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망할 '그것'인지 뭔지는 애초부터 우리에게 없었는데 마치 '그것'이 존재했던 것처럼 우리가 믿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상대에게 '그것'을 구현해내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더운 8월에 함박눈을 내려달라고 떼를 쓰는 것이나 다름없다.
처음부터 갖고 있지도 않았던 완전성을 여러분에게 되돌려 줄 수 있는 누군가는 세상에 없다.
결국 우리가 갈망한는 '그것'이란, 과거를 잊지 못하게 만드는 '미련' 또는 확실하지 않은 미래를 쫓도록 만드는 '허상' 비슷한 게 아닐까? 어떤 것이든 바로 지금 '현재' 상황이 불만족스럽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종류의 것.
인간이란 본디 불완전하다고 느끼는 존재다. 치유법은 없다. 튕기기 게임이 매혹적인 이유는 진실을 외면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서로의 감정을 가지고 노는 이 잔인한 게임은 상대도 나에 대해 똑같이 생각하도록 만들 수 있다. 그의 손아귀에 붙잡히지 않는 한 그 역시 나에 대해 엄청난 판타지를 품을 것이다. 이런 어마어마한 기대치가 있으니 눈에서 콩깍지가 떨어졌을 때 문제가 불거지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상대가 우리에게 '그것'이 될 때마다 우리는 상대 그 '이상'을 원하게 된다. 우리의 욕망은 우리가 상대에게 심어놓은 신비한 씨앗에 집착한다. 내 연인이 이랬으면 좋겠다는 소망의 씨앗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기에 말 그대로 그 사람 '이상'이다.
물론 우리는 이 점을 잘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상대가 지닌 매력이 그가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이 자신의 욕망이라는 걸 알지 못한다. 이런 소원 성취형 연애가 되지 않으려면 상대가 다면적인 존재란 걸 깨달아야 한다.
상대에게 여러분이 좋아할 만한 기본 자질(가령 정직성, 성실함, 책임감 등)이 우선은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그것'을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이 연인 사이의 공간을 다 차지해버리지 않도록 자리를 잘 찾아줘야 한다는 얘기다. '그것'은 아무리 매혹적이라 해도 연애의 일면일 수 밖에 없다. 그 일면이 두 사람이 함께하는 시간의 본질을 가려버려서는 안 된다.
만약 '그것'이 그토록 문제가 된다면, 그냥 없애버리면 그만이지 않을까? 하지만 내 경험상에 비춰보더라도 그럴 수 없다는 걸 금새 깨닫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좀 더 복잡하게 답하자면 '그것'이야말로 사랑을 황홀한 것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열정이라는 것은 바로 그렇게 직조된 것이며 바로 그 '알 수 없는 무엇' 때문에 상대에게 끌리기 때문이다. 상대가 '그것'을 줄 수 없다고 해서 그에게 없는 '그것'의 아우라를 우리가 잘못 감지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원래 가지기 어렵다는 사실을, 상대가 이런 찬란한 빛의 원천이 아니란 사실을 순순히 인정한다고 해서 그 빛을 누릴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바다는 달이 아니지만 달빛을 비출 수 있듯이 상대는 '그것'이 아닐지라도 여러분의 판타지인 '그것'의 빛을 낼 수 있다.
하지만 상대를 '그것'과 동일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그것'이 중요하지 않은 척한다면 그 또한 정직하지 않은 태도이다. '그것'은 특별한 경우에만 내어 쓰는 도자기 접시 같은 것이다.
이상형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문제는 매일 쓰는 그릇이 소중한 도자기의 공간을 다 차지해버린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일상과 '그것'이 언제나 배타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상대는 불완전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가 꿈에 그리는 '그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런 근시안적 태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연애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다.
나 자신은 싫을지 모르지만 괜찮은 상대를 매료시키는 데 내 단점은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다. 욕망은 독특함을 지양한다고 했던가? 욕망과 '그것'의 상관관계를 이해한다면 우연한 순간들이 대단한 인연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것'을 떠올리게 하는 상대는 나의 가장 나약한 부분을 건드리기도 한다. '그것'은 불완전함과 박탈감, 무력감, 부적절함이라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우리는 앞서 배웠다. 그것은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상실과 연결되어 있다.
첫 번째 종류의 애도(mourning)는 사랑하는 대상을 잃었을 때 느끼는 정상적인 슬픔이다. 우리가 잃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대상일 때 슬픔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우리는 서서히 슬픔에서 빠져나올 궁리를 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사물과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고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종류의 애도는 이와는 반대로 끝이 나질 않는다. 우리는 영원히 상실에 집착한다. 프로이트는 이런 종류의 끝모를 애도는 무엇을 잃어버렸느지 정확히 알지 못할 때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그는 이런 종류의 슬픔을 '멜랑콜리아'라고 불렀다. 자기 자신이 절대적으로 완벽한 주인공이 아님을 깨달았을 때, 이유 없이 몰려오는 공허함과 무력감, 끝없는 상실감… 기분이 참 멜랑콜리하다고 하는구나...
'
그것'은 멜랑콜리아, 즉 끝모를 애도와 상관이 있다. 때문에 연인이 우리의 '그것'을 되살리면 그는 우리의 욕망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우리 존재의 감상적인 본질을 건드리게 된다. 그 이유는 최고의 기쁨과 최고의 고통이 '그것'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첫인상에 좌우되어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은 무모하며 이런 욕망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흔히 치부되곤 한다. 그렇다고 '그것'의 끌림을 무시하라고 말하는 것은 욕망을 움직이는 결정적인 요인을 간과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실낙원을 회복하려는 매우 인간적인 욕망과 관련이 있다. 이 점은 우리가 이제껏 배워온 튕기기 게임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말하는 '그것'은 세상 어느 누구도 구사할 수 없는 미지의 언어를 구사한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그것'이 만나면 둘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른다.
잊지 말자. 첫 눈에 반한다는 감정도, 욕망도, '그것'도.. 결국은 내가 가진 이성과 감정이 개입해 판단을 한 뒤 오롯이 내가 내린 '선택'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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