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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리] (협상가를 위한) 감정수업 : 상대방을 믿어야 할까? 믿지 말아야 할까?
    책/인문 2020. 5. 14. 18:04


    안녕하세요! 훤칠한 흔남입니다 :-)


    (협상가를 위한) 감정수업 세 번째 시간!



    사회와 국가는 두 균형 가운데 하나에 이를 수 있다. '좋은' 균형에 이르면 개인은 서로에게 믿음을 보내고, 견실하고 협력하는 태도록 타인을 대한다. (그래서 신뢰가 올바른 가치임을 증명한다.)

    아니면 '나쁜' 균형에 이르러 개인이 서로를 믿지 못하고, 이런 신뢰 부족을 자기 합리화의 구실로 삼아 참되고 미덥게 행동해야 한다는 자각 없이 행동한다. 경제학자들은 이 균형이 임의 과정에서 발생하느냐 아니면 최초 조건에 좌우하느냐 문제를 두고 갈라섰다. 첫 번째 의견이 맞다면 과거에는 기회가 똑같았다. 이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세우는 이들은(예컨대 보다 풍부한 천연자원이나 여러 문화 사이의 고유한 혼합 등과 같은) 조건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고 주장한다.

    수렴 이론 지지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나쁜 균형이 변화에 전복당해 좋은 균형으로 옮겨 가는 일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반면 반대자들 주장을 보면 이런 균형은 상당한 시간이 지나면 하나의 체계가 최초의 상태로 돌아가는 조건에 처하는 '에르고드적(ergodic)'이거나 '흡수'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한 균형에서 다른 균형으로 이동하는 일이 어렵다는 뜻이다. 경제 이론 대다수는 널리 인정받는 이론이라도 지지하거나 반박하도록 실증적인 결과를 낼 수 있는 방안이 그야말로 전혀 없다.


    잘 알다시피 차별은 의기왕성하다. 우리는 주변에서 노골적인 차별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사회가 공공연한 차별 행위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로부터 관심이 멀어지면 숨어 있던 차별이 추악한 얼굴을 쳐든다.

    규범 이성에 따른 행동은, 용어에서 암시하듯 그 토대가 본능에 각인된 규범으로 평생 수없이 다양한 상호 작용을 나눌 때에 대체로 이롭다. 반면 행동 이성에 따른 행동은 보다 집중적인 인지 과정을 필요로 하며 구체적인 상호 작용에 적합하다.

    신뢰와 불신은 주로 감정 규칙이 지배한다. 하지만 이 규칙은 빠른 결정을 내리게 한다는 점에서는 유리한 반면, 과잉 일반화에 치우칠 수 있다는 면에서는 매우 불리하다. 꿀벌 실험은 우리 무의식에 내재한 편견이 얼마나 위험한지 가르쳐준다.


    처음 남유럽인을 향한 불신의 표시는 사소하고 미미했다. 이런 불신을 받은 대상은 나름 어느 정도 불신을 돌려주며 대응했다. 불신이 자연스럽게 불신하는 반응을 불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태도가 남유럽인에 대한 차별이 정당화되는 의미로 해석됐다. 그래서 남유럽인이 더욱 차별받기에 이르렀고 따라서 불신이 더욱 단단해졌다. 대인 관계 속에서 번번이 소통에 실패하는 이유는, 분명 이런 자기실현적인 불신 때문이다.


    자민족중심주의는 자신만의 문화적 잣대에 입각해 다른 사회 사람을 판단하는 태도를 일컫는다.

    우리는 사는 내내 매일매일 타인과 상호 작용하는 상황에 놓인다. 게다가 이런 상황을 겪는 경우는 빈번하게 일어나며, 단 한 번으로 그치는 신뢰 게임보다 훨씬 중요한 의미를 띠어 우리 환경에 만연한, 신뢰나 관용에 관한 문화 규범을 우리 직관 속에 새겨 넣는다. 이런 직관을 지니고 있느냐 아니냐는 사회적 성공에 아주 중요하다. 사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분석하는 능력보다 어쩌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자민족중심주의에서 가장 위험한 요소 가운데 상당수가 다른 문화 규범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는 데 기인한다. 협정을 맺으려면 협상자가 자민족중심주의를 극복하고 대화 상대 입장에 서서 생각해보는 태도만으로는 부족하다. 두 나라 국민 대다수도 이 자민족중심주의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 폭넓은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하면 어떤 협정도 지켜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집단 소속 욕구는 엄청 강해서 맥락이 닿지 않는 추상적인 상황에서도 존재한다. 집단 응집력을 조장하고 유지하는 기제는 본질적으로 집단 감정을 이끌어내는 감정 기제다.

    과학과 기술과 예술의 발전은 주로 개인 차원에서 작동하는 인지적이고 감정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인류가 걸어온 사회 역사를 보면 대개 집단 감정이 좌우했다. 전쟁과 조약뿐 아니라 일대 혁명과 전면적인 정치, 경제 변혁은 대체로 이런 감정이 주도했다.

    축구 시합을 즐기는 팬은 주변에 팬이 더 있을 때 지치지 않고 더욱 열정을 발산한다. 그리고 이 열기는 다시 주변에 있는 다른 팬에게 전염된다. 이것이 되먹임 고리다. 예컨대 저스틴 비버 같은 아이돌을 보고 소녀가 기절하여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경우도 거의 항상 함께 모여 집단 속에 있을 때다. 그 아이돌 가수를 일대일로 만난다면 보다 차분한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

    집단 감정은 때떄로 대립 집단이란 존재가 필요하다. 이 대립 집단은 경쟁의 상대나 위협의 원천 역할을 한다. '우리'라는 집단을 지켜내기 위해 '적들'이라는 집단이 필요한 셈이다. 

    집단 감정에 대한 진화의 기원을 특히 강력하게 보여주는 증거는 우리가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집단 감정을 불러일으키려고 애쓴다는 사실이다. 특정 집단에 속해 있다는 정체성이 사활이 걸린 어떤 이익이 되지 못해도, 이를 보여주는 예가 바로 스포츠 클럽에 대한 팬 정체성이다. 스포츠 팬 클럽은 실재하는 목표가 없다. 집단 감정이 생기는 주된 동기는 생존에 필수적인 자원을 얻을 때, 특히 무리 지어 사냥을 나갈 때 집단의 도움이 꼭 필요하기 때문에 집단 감정이 종종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더 필요하다.


    왜 우리는 지원자 개인 자질에 대해서가 아닌 오로지 집단 정체성에 근거하여 거절하는 편지에 더욱 모멸감을 느낄까? 앞의 편지에는 지원자가 불합격한 데에 합리적인 근거가 될 만한 내용이 들어 있는 반면, 뒤의 편지에는 타당한 명분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듯한 근거를 제시하는 듯 보이는 편지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로 분노를 낳는다. 개인뿐 아니라 집단 정체성도 모욕하기 때문이다.


    불이익 원리와 십계명과 집단 생존을 보장하는 또 다른 기제

    가장 널리 인정받는 진화 모형의 중심에는 두 가지 주된 요소가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변이'와 '선택'이다. 변이로 인해 생명체에 무작위로 형질 변화가 일어나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진다. 그런데 선택이란 기제 때문에 '우월한' 변이는 개체군 사이에 널리 퍼지고, 반면 '열등한' 변이는 서서히 사라진다.

    '무엇을 개체로 보느냐'는 철학적인 질문이며 이에 대해 명백한 대답이 오직 하나일 수만은 없다. 사실 하나의 인간은 수많은 개개의 세포가 신체 내에 모인 집단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타주의라는 주제도, 혈연 선택의 모형으로 가족을 위해 왜 개인이 스스로를 희생하는지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남을 돕는 데 만족하면서 심리적 보상을 얻는다는 말만으로는 이 현상을 설명하기에 충분치 않다. 이렇게 흐뭇한 마음이 깃드는 증상이야말고, 곧 주는 행동이 개인의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말한다. 마치 달콤한 초콜릿을 먹을 때 기분이 밝아지는 증상이 설탕이 우리 생존에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나타내듯이,


    '불이익 원리(handicap principle)'가 가정하는 바에 따르면, 동물은 스스로 불이익을 당하거나 분명 위험해 보이는 상황에 스스로 뛰어들어, 잠재적 짝에게 우월한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 짝짓기에 성공할 가능성을 높이거나 경쟁자보다 뛰어나다고 과시한다. 혹자는 이렇게 주장할지도 모른다. 예컨대 위험천만한 군부대에 자원하는 행동은 무엇을 보상으로 받을지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이타주의로 볼 수 없다고. 진정한 이타주의는 무엇을 보상으로 받을지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그냥 주는 것이라고. 어떤 생물학자는 사실 자연에서 순수한 이타주의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이런 행동을 보이는 개체가 어떤 이점도 얻지 않으면 이런 행동은 자연 선택을 통해 소멸한다는 데 있다. 강박적인 이타주의자는, 주고 또 주는, 퍼 주기만 하는 사람은 진화 관점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인간은 이기적이니까 나쁜 것이다? 그러니 성악설에 부합하는 존재다? 이타적인 것은 착한 것이다? 이기적이니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도 있으며, 이타적이니까 헌신하기만 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도 있다. 각각의 단어가 의미하는 정확한 본질을 깨닫고, '이기적인 것은 나쁜 것이다, 이타적인 것은 착한 것이다' 라는 명제의 모순에서 벗어나자.

    인구 집단 내에서 이타주의 행동이 확산하는 이유를 유전자 입장에서 보는 진화론에 입각해 설명할 때에, 세 가지 요소가 바탕이 된다.

    1. 억제, 연대감이나 타인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개인은 사회관계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다라서 그런 행동에 혹독한 대가를 개인적으로 치르기 때문이다.

    2. 불이익 원리, 눈에 튀는 이타 행동으로 개체에게 번식 기회가 늘어난다.

    3.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는 환경에서 타인을 돕는 행동은 이타주의자 유전자를 더욱 퍼뜨리는 데 일조한다.


    집단 선택 모형에서 변이가 하는 역할은 집단이 규범이나 행동을 영원히 고착하지 않도록 변화를 주는 데 있다. 이 변이는 시시각각 다변하는 환경에서 특히 중요하다. 그리고 소수자에게 관대하고 대중 집회를 보장하고 기행을 용납하고 생각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회라면, 변이는 긍정적인 힘을 발휘하며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다. 변이 덕분에 집단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다. 인류 역사에서 매우 획기적인 사회 변화는 대부분 사회적 타성에서 벗어난 행동으로 촉발했다. 근본주의자가 판치는 사회에서는 변화를 도입하려는 온갖 시도를 무참히 와해하며 사회적 변이가 일어나지 않도록 아예 봉쇄한다.


    사람이 일을 할 때 물질 보상이 항상 의욕을 고취한다는, 보상은 결코 의욕을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가정에 대해 실험에 착수했다. 모금 활동에 들인 시간과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모아 온 기부금의 일부를 받는다고 듣는 순간, 불우한 이웃을 돕는 선행으로 얻는 정신 보상과 만족감이 손써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뚝 떨어졌다. 이제 이 과제는 선의로 뭉친 자발적인 활동이 되지 않고 수당을 받는 일로 전락했다. 그런데 일로 여기자니 드는 품에 비해 삯이 보잘 것 없었다. 처음부터 일로 제안받았다면 아마 일도 수당도 다 거절했을 것이다.

    친한 친구를 집으로 초대해 근사한 식사를 대접하고 헤어질 무렵, 손님 부부가 집을 나서려는 순간, "깜빡할 뻔했군. 그래 이 훌륭한 저녁값으로 얼마면 되겠나?" 금전으로 보상을 제시하면 이타적인 행동이 퇴색하여 마음의 동기가 적어지듯, 마찬가지로 이기적인 행동에 벌금을 매기면 사실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경우 느꼈을 양심의 가책을 덜어주어 더욱 이기적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한다.

    개인 차원에서 예컨대 친구 사이에서 대체로 신세 진 일을 잊지 않고 꼭 기억해두라고 유독 강조한다. 그리고 누구나 되도록 빨리 이 신세를 갚으려고 애쓴다. 대개의 경우 이런 태도는 베푸는 사람이 되고 싶은,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난 동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솔직히 말하면 속물근성 때문이다. 사회에서는 호의를 입었으면 갚아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호의를 받은 사람 입장에서는 '신세 지고 못 갚은 빚'을 가능한 빨리 청산하려고 노력한다. 호의를 베푼 사람이 이 행동에서 얻는 만족감을 해치면서까지. 주는 행동 자체가 보상이지만 때때로 받는 행동이 도리어 호의를 베푸는 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호의를 베푸는 사람이 그 행동으로부터 진실된 만족감을 느끼는지 여부에 따라, 신세 갚는 행위를 보여줘야 할 신호로 받아들이면 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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